복음의 진리 6

복음의 진리 6

‘율법과 약속’ – 복음의 진리 6
갈라디아서 3장 10-22절

오늘 말씀은 구약으로 대표 되어지는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로 대표되어지는 약속, 이 두 가지가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서로 상반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약속이 성경 전반에 깊이 깔려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계 기독교인들에게 바울이 전한 복음이 왜곡되어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율법과 행위가 구원보다 앞선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수정합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고 순종과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될 것이라 전하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순서가 바뀐것이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이것은 두가지의 완전히 다른 종교를 의미하는 것이며 행위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메세지를 따르는 삶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메세지가 드러내는 삶은 전혀 다릅니다.

오늘 말씀은 모세와 아브라함 즉 율법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브라함을 대비 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갈 3:8)
열방의 아버지라는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주는 복이 도대체 무엇인가요? 왜 아브라함을 통하여 모든 열방이 복을 받으리라 성경은 전하고 있을까요?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시리라 한 약속은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과 후손을 땅을 티끌처럼 주시리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이 약속은 언어를 달리 하지만 수차례에 걸쳐 아브라함에게 전해졌고 이후 이삭, 야곱, 요셉에게도 전해졌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서의 ‘자손’이 단수 형태로 쓰인 것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창 13:15-16)
후손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이스라엘에 정착하게 됨이 약속의 최종 성취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이 이스라엘에 정착하는 것이 우리 이방인들에게 주는 복은 무엇이며 ‘영원히 이르리라’ 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일차적 성경적 의미로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땅을 주시고 모세를 통해 그 땅을 회복시키시고 바벨론 포로 시대 후 느헤미야를 통해 잃어버렸던 땅을 다시 찾아주십니다. 백성들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 땅을 유지하게 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축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을 전하고 있는것이 아닙니다.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이르리라’ 네 자손 즉 단수형태로 쓰인 ‘자손’에게 주신다는 그 땅은 궁극적 약속의 성취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아브라함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의롭게 되는 축복이 있고 보이는 땅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저희에게도 주어진다는 것이 이 약속의 궁극적 성취인 것입니다.
이방인들 모두에게도,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약속이 눈에 보이는 구약의 약속 정도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참된 땅,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주어질 것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구약과 신약이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궁극적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 네 자손(the seed)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루어진다는 신 구약을 통괄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4)
그렇다면 약속의 언약과 율법의 약속이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마 약속하실 때 하나님은 ‘그저 내가 너에게 주겠다’ 하셨고 이에 대해 아브라함은 그저 받을 것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받았습니다. 이것이 약속입니다.
율법은 요즘말로 계약(contract)입니다. ‘네가 이것을 하게 되면 그것을 줄 것이다’라는 율법입니다.
이 두 가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모세로 대표되는 율법은 약속입니다. 우리의 행위에 따라 나옵니다하지만 아브라함이 받은 언약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따라 주어진 약속입니다. 쌍방이 주어지는 것이 율법이고 하나님 혼자 모든 것을 하시는 것이 약속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축복을 주신다 했을 때 아브라함은 그것을 순전히 받아 들였을까요?
그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창 15:8-11)
그 당시 약속을 맺을 때에는 짐승을 가져다 반을 가르고 그 위를 거닐었다 합니다. 그 의미는 만약 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는 그 동물들과 같이 배가 쪼개어지는 죽음에 이를 것에 동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약속은 정복자가 피 정복자와 약속을 맺을 경우였습니다. 그래서 주로 약자들이 그 쪼개어진 짐승 사이를 지나갔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짐승들을 가져오라 하실 때 그것이 계약임을 알고 짐승들을 갈랐습니다. 그런데 그 후 해가 지게 되고 완전한 깜깜함, 흑암이 이르게 됩니다.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창 15:17)
쪼갠 동물 사이를 지나가야 하는 사람은 수해를 얻게 되는 아브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타는 횃불이 지나갑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약속이 안 지키어 질 경우 그 자신이 그렇게 쪼개어 질 것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하나님께서 쪼갠 짐승 사이를 거니시는 것은 하나님의 불멸하심이 이 약속 때문에 멸망함으로 바뀌어 지는 것이고 약속이 안 지키게 되면 하나님의 무한하심이 유한하심으로 바뀌어 지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으셨음에도 그 약속에 관하여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주시기 위해 짐승 사이를 거니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신 이 약속은 그림자일 뿐이고 예수님께서도 이 약속-구원,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을 우리에게 줄 것을 약속하시며 똑같은 일을 하셨습니다.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5-46)
예수님께서 동물이 아닌 자신의 몸을 제물로 바치십니다. 분리할 수 없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나뉘어 지십니다. 하나님의 본체가 나뉘어 지고 찢겨지고 있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실 것을 명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직접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의 구원과 영생, 하나님의 나라를 반드시 주실 것임을 모든 믿는 자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무 한 일이 없이 약속을 받은 것처럼 우리가 기여한 바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으로 저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고 이것이 기쁜 소식, 복음인 것입니다. 이 약속은 구약의 처음 아브라함으로 부터 계속 되어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전히 이루어 졌습니다. 이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자들에게는 의롭다 함, 구원을 받게 되는 역사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영적인 세계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금광맥입니다. 복음은 수 많은 인류역사의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흔들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감격과 나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깨닫고 그 길을 알게 될 때에 우리의 삶은 변하게 됩니다. 복음은 능력이 있습니다. 이 진리가 얼마나 큰 능력이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말씀 19-21절을 보자면 율법은 우리가 범법함으로 주어졌다 전합니다. 십계명은 억압된 삶을 살았던 사람에게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함으로 자유를 누리게 하고자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건강을 지키고자 음식이나 운동을 조절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율법으로 주시고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자유와 생명을 주시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키며 우리는 세상 방법, 바알을 택합니다. 바알을 통해 축복받기를 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20절에서 중보자 모세의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다른분이 아님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쫓겨다니는 신세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해 주십니다. 구원을 받은 자, 자유를 받은 자로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기꺼이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다윗에게는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쁨으로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큰 축복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의 약속, 복음이 주어졌고 우리가 그것을 붙들고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많은 축복으로 채워주실 것임을 믿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라시는 것들을 기쁨으로 할 수 있게 됩니다. 십일조도 기쁨으로 할 수 있고 말씀이 젖 땐 어린아이가 평안을 누리듯 기쁨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바울 선생은 이렇게 율법과 약속이 하나임을, 약속의 하나님이 구악과 신약을 아우르는 그 하나님임을 전하고 있습니다.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사 41:14)
제 삶에서 해야할 일들을 하지 못함으로 힘들어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 열심으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적도 있었습니다. 복음을 잘 알고 있었던 목사였음에도 계속 그 일을 반복합니다.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불안을 없애기 위해 내 열심을 냅니다. 지칩니다. 혹 일이 잘 되면 교만으로 충만해지기도 합니다. 열심과 불안함 사이에서 널뛰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 널뛰기가 땅 속의 버러지, 지렁이와 비슷함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지렁이는 때로 자신의 길을 가고 싶어 궤도이탈을 합니다. 흙 속을 다니다가 궤도 이탈을 해 아스팔트의 뙤약볕에 말라 버리는 지렁이가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저희에게 말씀하십니다. ‘지렁이 같은 너, 내가 너를 구속하리라’
우리의 열심은 한계가 있다 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우리를 지켜주신다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 걱정과 불안을 가지고 나아와 하나님께 울부짖을 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축복할 것이고 결국에는 아브라함에게 주었던 것처럼 생명있는 구원으로 이끌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너의 궁극은 멸망이 아니라 생명임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경험하는 순간 우리의 삶은 변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붙들어 주시고 생명으로 인도해 주시는 것을 경험하는 순간 내가 바라보는 눈길들이 바뀌어 지게 됩니다.
성경은 전합니다. ‘일만달란트를 탕감해 주었건만 어찌 삼백 데나리온에 연연해 하느냐’
우리도 마찬 가집니다. 복음의 일만달란트의 값어치를 충분히 누리는 사람들, 내 힘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나를 움직이실 것임을 믿게 되면 사람들과의 관계가 변하게 됩니다. 아내와 남편의 관계가 변하게 됩니다. 순전히 율법이고 세상적인 계약에는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거짓말에도 ,배반에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변하지 않고 아브라함을 붙들어 주십니다. 이스라엘이 수도 없이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지냈음에도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하나님의 열심은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그 사랑이 일만달란트인 줄을 알고 깨닫는 사람은 삼백 데나리온에 연연해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내를, 남편을 조건에 관계없이 신실하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풀려질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하게는 나와 나와의 관계가 개선되어질 수 있습니다. 실패 가운데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열심으로 그 관계를 바라 볼 때 우리는 다시 소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며 부정적인 것들이 떠나가고 긍정적인 새 소망이 우리 가운데 생겨지게 됩니다.
이 복음의 능력은 수 많은 사람을 움직였으며 지금 여러분도 움직이실 수 있습니다. 단지 복음에 감격해 하고 하나님이 나를 끝까지 붙드시는 신실하신 분임을, 스스로 배를 가르시기까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 끊어지시기까지 저희를 사랑하시는 그 분이 계심을 여러분이 진심으로 받으시는 주님의 제자들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